사행추 한옥 2017. 3. 8. 11:10

 

 

 

 

 

 

 

 

 

 

 

 

 

 

 

 

 

배론성지를 두번째 찾았던 지난 토요일엔...

 바람이 많이도 불었습니다...

3월 첫번째 토요일인 4일...

꽃샘추위도 찾아왔고...   심적으로도 몹시 바람불던 날...

솔직히 마음안의 바람은 며칠째 계속 불었던 듯합니다...

 

 

우리집에서 배론성지까지 46.5km...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시간 50분...

 

 

계절적 봄을 타는 건지... 

흔히 말하는 갱년기 증상인지...

이래저래 마음도 편치않고...

그 핑계로 한동안 자연스레 미사까지 빼먹다가...

그냥 문득 바람쐴 겸 다녀왔습니다...

바람이 좀 잔잔했어도 좋았으련만...

마음과 바람이 정비례했던 날이었습니다...

 

 

 

생각없이 다녀온 후에 배론성지를 찾아봤더니...

Daum 백과사전이 친절히 알려줍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을 그래도 옮겨봅니다...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있다. 이곳은 1791년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마을이 위치한 계곡이 배[舟] 밑창을

닮았다 하여 배론[舟論]으로 불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이곳의 옹기굴에 숨어 있으면서 조선 교회의 박해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순교했다.

1855년에는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張周基)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 니콜라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1861년 최양업 신부가 문경(聞慶)에서 병사하자 푸르티에 신부 일행이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다.

'성요셉 신학당'은 한문이나 한글뿐 아니라 수사학·철학·신학 등도 가르쳤으며

한국 천주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 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신학당 터와 최양업 신부 묘소, 박해시대의 옹기굴 흔적 등이 남아 있다.

1932년 몇몇 사제들이 매입하여 보존해오다가,

1977년 원주교구에서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개발을 시작했다.

 

양기섭 신부에 의해 '성요셉 신학당'이 복원되고 각종 기념물이 세워져 순례지로 되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