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설화
이 이야기는 고구려 25대 평원왕 때의 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평양성 외곽 산골에 온달이라는 가난한 청년이 눈먼 어머니와 살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겉모습은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마음씨는 착했다."고 합니다.
매우 가난했던 온달은 날마다 구걸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누더기 차림에
구걸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고 '바보 온달'이라고 놀렸답니다.
한편 평원왕에게는 평강 공주라는 예쁜 딸이 있었는데, 대단한 울보였답니다.
그래서 왕은 툭하면 울음보를 터뜨리는 공주를 달래며 "계속 울면 이 다음에 바보 온달한테
시집보낸다."고 엄포를 놓곤 했답니다.
그리고 공주의 나이 16세가 되자 왕은 상부 고씨의 아들을 공주의 배필로 삼으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공주는 "임금은 허언을 하지 않는 법"이라며 온달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답니다.
왕은 펄쩍 뛰었지만 공주가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자 공주를 궐 밖으로 쫒아냈습니다.
평강공주는 그 길로 산골에 사는 온달을 찾아가서 금팔찌를 팔아 말과 소를 사는 등
살림살이를 꾸리고, 온달에게 말 타는 법과 활쏘기를 연습시켰습니다.
바보 온달이 온달 장군으로 거듭나는 기적이 시작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그가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을 뿐 결코 바보라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단지 묵묵히 자기 일만 하고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였을 뿐, 그가 진짜 바보였다면
몇 년 만에 뛰어난 무사가 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고구려는 해마다 3월 삼짇날이 되면 평양 교외의 낙랑 언덕에서 사냥 대회를 열었는데,
왕과 신하는 물론 5부의 병사들이 모여 사냥하고, 그날 잡은 사냥감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날 온달도 말을 타고 나갔는데, 말을 부리는 솜씨가 뛰어나고 사냥 솜씨도 탁월해서 1등을 차지했습니다.
왕이 불러서 이름을 묻고는 그가 자신의 사위임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온달은 그 후 북주군의 요동 지방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에 서서 북주군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이라는 관직을 하사받음으로써 고구려 지배 세력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부마가 된 온달은 그 후로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고 합니다.
평민 온달이 신분 상승에 성공한 것입니다.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전략적인 이유로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던 곳입니다.
삼국 가운데 한강을 가장 먼저 차지한 백제는 한강을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 강 주변의 기름진 곡창 지대를 차지했으며, 빠른 교통수단으로 강을 활용해 전략적,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장수왕이 한강을 차지하고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도 세웠습니다.
고구려가 한강 지역을 정복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강했던 고구려도 신라 진흥왕(6세기)에게 밀리기 시작하면서 영토 전쟁에서도 밀리더니,
결국에는 한강 유역도 신라에 내주게 되었습니다.
특히 평원왕 당시의 고구려는 국력이 쇠퇴해지기 시작하면서 한강 주변과 죽령 남쪽의 영역을 잃었습니다.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도 국력의 쇠퇴를 두고 고민에 빠졌고, 대장군의 반열에 올라 있던 온달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칭해서 남쪽의 옛 땅을 회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평강 공주에게 "죽령 이북의 우리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소." 라는 다짐과 함께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긴 영토을 되찾기 위해 전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신라와 접전을 벌인 곳이 바로 온달산성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온달은 치열한 전투 중에 그만 화살을 맞고 전사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관을 움직이려 했으나 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때 평강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갈라졌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요."
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온달산성을 오르는 중간에 '사모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온달 장군의 관이 멈추었던 자리라고 합니다.